일상 : 비일상

발자국을 쫓는 눈

WickeDio 2021. 6. 11. 18:30

 나는 어딘가에 가서 발자국 남기는 것을 꽤 재미있어하는 편이다.


 


 뉴질랜드의 뉴브라이튼비치나 썸너비치, 카이코라, 아카로아, 모투에카 골든베이에서도 발자국을 잔뜩 남기고 난 후 파도에 슬슬 녹아내리는 것을 보는 것을 즐겼다.


Tasmanbay, Nelson


 강원도 사근진해변이나 사천 등의 동해바다에 갈 때도 곧잘 발자국을 남겨놓고 왔다. 발이 닿을 때 그 느낌도 마음에 들지만 찍힌 발자국을 뒤돌아 보는 것은 묘한 성취감이 들기도 한다. 이런 행동을 부담없이 즐길 수 있는 이유는 바로 발자국은 금방 사라지기 때문이다. 만약 내가 방금 남긴 발자국이 계속해서 남아 있다면 이렇게 마음놓고 찍어댈 수는 없을 것이다.


태즈먼베이가 떠올랐던 강릉에서


 단순히 내 발자국을 남기는 것만 좋아하기보다 다른 사람들이 남겨 놓은 발자국을 보는 것도 좋아한다. 인도 푸쉬카르의 사막에 갔을 때 모래에 푹푹 묻히던 낙타를 타고 앞서 간 사람들의 발자국과 흔적을 보는 것은 흥미로운 경험이었다. '아, 누군가 이 길을 성큼성큼 갔구나', '낙타를 타고 꽤 많은 사람들이 먼저 이 곳을 지나갔구나' 하는 생각들을 하며 내가 느끼는 그곳의 분위기와 풍경, 공기, 냄새 등을 얼굴도 모르는 사람들과 공유하는 기분이 들었고, 또 그것이 나름대로 의지가 되기도 했다. 


푸쉬카르 사막 낙타 트레킹 中


 20대 때 배낭여행을 다닐 때에는 스마트폰이 일반적으로 상용되기 바로 직전이었다. 그래서 여행을 할 때는 항상 지도와 더불어 현지인들에게 물어보는 것에 의존을 했는데 정말 인적이 드문 곳은 '발자국'만한 것이 없었다. 발자국이 많은 곳으로 따라가다 보면 주로 일(?)이 잘 풀리곤 했다. 트레킹을 할 때에도 간혹 MTB를 하는 경우에도 이 자국들을 쫓다보면 거의 해결되었다. 사실 길이라는 것은 사람들에게 자주 밟혀 난 것이니까. 어쨌든 익숙하지 않은 곳에서 내 눈은 항상 발자국을 쫓았다.


마이레하우 월터파크 근처


 이 블로그를 시작하게 된 이유도 발자국을 남기는 행위에서 비롯되는 묘한 만족감과 기록하고 기억하고 싶은 욕구, 그렇지만 부담스럽지 않도록 언제든 삭제할 수 있는 시스템이 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. 어떤 분야나 글을 쓰는 것에 있어서 '한 획을 그어야지, 내 발자국을 잔뜩 남겨야지' 이런 마음은 아니다. 그저 다른 사람들이 걸어온 것을 보고, 또 따라 가면서 한 걸음 한 걸음 소소한 일상과 관심사에 대해 기록하고 싶은 것 뿐이다. 수 많은 발자국에 묻어 같이 걷는 것이 가장 부담없고 쉬운 일이니까.


새벽의 퀸즈타운


 위에서 잔뜩 발자국 남기는 것을 좋아한다고 써 놓았지만 파도에 쓸려 자국 없는 말간 해변에, 아무도 밟지 않은 눈 밭을 처음 걸으려고 마음 먹을 때 가끔 무척 조심스럽고, 망설여질 때가 있다. 뭐 이럴 때도 있고 저럴 때도 있는 거겠지만 어쨌든 중요한 것은 난 발자국을 남기는 것을 매우 재미있어하고, 남의 발자국을 쫓아가는 것도 즐거워 한다는 것.


더니든역의 철길


  발자국 하나를 생각해도 복잡해지는 이런 마음들을 하나씩 하나씩 내 방식대로, 언어로 남겨놓으려고 한다.

그러다보면 무언가 길이 보이려나.